2020. 9. 15. 03:38ㆍ일상, 관심사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신지가 조종하는 초호기에는 몇가지 숨겨진 설정이 있다. 바로 이전 포스트에서 다뤘던, '지혜의 열매'와 '생명의 열매' 설정과 관련된 부분이다.
(이전 포스트) beomdoc.tistory.com/m/133
이와 관련한 초호기의 비밀에 대해, 자칭 '에반게리온 1타강사'인 유튜버 '무비팬더'가 친절하게 알려준 영상이 있어 가져왔다.
이 두편의 동영상을 통해 무비팬더가 알려준 내용 중 가장 신박했던 부분은, 초호기가 '생명의 열매'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TV판 제19화에서 폭주한 초호기가 사도 제르엘을 물리치고 먹어치우게 되는 장면을 보고, 그 과정에서 초호기가 제르엘이 가지고 있는 코어이자 S2무한동력기관, 즉 '생명의 열매'를 얻게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초호기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오르게 하고, 아주아주 그로테스크한 장면에 빠져들기 때문인지, '제레' 뿐만 아니라 시청자들도 "아, 초호기가 이때 '생명의 열매'을 가지게 되는구나!"하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한 연출이었다.
하지만 무비팬더가 알려준 대로, 초호기는 제르엘의 S2기관을 흡수하기 전에도 이미 '생명의 열매'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들이 있었다. 신지가 처음으로 초호기를 조종하며 상대한 사도 사키엘에게 팔도 부러지고, 눈과 머리가 관통당해 움직일리 없었던 초호기가 부러진 팔을 수복하고 강력한 힘으로 사키엘을 물리치게된다. 게다가 잃었던 눈도 전투 후에는 재생하게 된다.
제르엘과의 전투 장면에서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 왼쪽 팔이 잘려나가고, 배터리가 방전되어 멈춘 초호기가 다시 재가동되어 잘려나간 왼쪽 팔을 제르엘의 칼날 같은 팔을 뜯어 자기 팔에 붙임으로써 재생시킨다.
이처럼 훼손된 신체가 다시 재생되고 배터리가 방전된 상태에서도 움직이는 무한 동력과 같은 특징은, 본 작품에서 '생명의 열매'를 가진 존재만이 가능하다는 설정인데, 초호기가 이미 그런 상태였다는 것이다. 나는 초호기의 코어에 흡수된 신지 엄마, 이카리 유이의 도움으로 이게 다 가능했던 것 아니냐는 막연한 상상을 했었고, 작품 속에는 이를 연상시키는 연출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안노 감독의 낚시였을 뿐이다. 무비팬더의 '생명의 열매' 설명이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처음부터 초호기는 '생명의 열매'를 가지고 있었다는 설명에 대해 비판하는 댓글도 적지 않다. "초호기가 이미 생명의 열매를 가지고 있었다면, 겐도는 왜 초호기가 제르엘의 S2기관을 흡수하는 것을 보여줘서 제레에게 공격당할 빌미를 주었는가?"라는 논리다. 이는 "제레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라는 카지의 대사와, 제르엘과의 전투 이후 겐도는 초호기를 동결시킴으로써 제레에게 사고임을 강조하는 것, 그리고 코조가 제레에게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는 부분과 연결되기에 일견 타당한 논리다.
그러나 초호기가 제르엘을 잡아먹은 것은 겐도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사실 초호기의 건조 방식은 아담의 유전자를 복제하여 만든 다른 에바와는 다르게 '리리스'의 절반을 뚝 잘라내어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네르프와 함께 에바건조계획인 E계획에 계속 참여했던 신지의 엄마, 유이는 스스로 코어에 흡수당함으로써, 시간이 흐른 뒤 성장한 신지와 함께 초호기를 신과 같은 상태로 만들어 멸종의 위기에 처한 인류의 '보완계획'을 진행시키려는 의지가 있었음이 밝혀지게 된다. 게다가 사도 레리엘이 만든 '디락꾸의 바다'에 초호기가 빠졌을 때도 초호기의 회수를 최우선에 둔 리츠코와 겐도의 발언들을 보면, 초호기가 다른 에바와는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있음을 의미하는 장면이다.
'제레'에게 초호기는 다른 에바와 다를 것 없는 존재였겠지만, 초호기의 비밀을 알고 있는 '네르프'의 겐도에게는, 자신의 의지대로 '인류보완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생명의 열매'를 가진 초호기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조용히 자신만의 '인류보완계획'을 진행 중이었던 겐도는, 초호기가 제르엘을 먹는 장면을 제레에게 보여주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설마 초호기가 사도를 먹을줄이야. 아무리 천하의 겐도라도 이를 어떻게 예측했겠는가.
하지만 겐도는 초호기가 '생명의 열매'를 가지게된 것을 '제레'가 인지함으로써, 사해문서에 기록되어 있던 남은 사도들의 침공을 앞당기게 되고 네르프가 모든 사도들을 물리치게 되면, 결국 겐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인류보완계획'의 실행을 앞당길 수 있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미 네르프 본부와 마기 컴퓨터에 해킹하는 방식으로 공격했던 사도 이로울의 침공 이후, 겐도는 '제레'의 위원회에 불려가 네르프 본부가 직접 공격당한 부분에 대해 추궁당한 바있다. 네르프 본부의 직접 공격은 없었다고 겐도는 해명했지만, 이 사실을 알고있는 '제레'가 사도의 침공에 어느 정도 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의심했을 것이다.
초호기가 처음부터 '생명의 열매'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어떻게 가지게된 것이냐도 고민해봐야 한다. 무비팬더의 동영상에서는 아담을 발견한 인류가 여러가지 실험을 하던 중에 세컨드 임팩트를 일으켰고, 이때 롱기누스의 창과 태아 형태의 아담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때 같이 얻게된 '생명의 열매'를 초호기에 넣지 않았겠냐고 얘기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초호기는 외부에서 '생명의 열매'를 주입 받은 것이 아니라, 리리스의 분신이기 때문에 '생명의 열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에반게리온의 작품 설정은 아담의 후손인 사도에게 '생명의 열매', 릴리스의 후손인 릴린(인간)에게 '지혜의 열매'가 있다는 것이지, '아담'과 '리리스' 두 존재들도 둘 중에 하나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릴리스에게도 '생명의 열매'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제22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도 아라엘이 침공했을 때, 초호기는 제르엘과의 전투 이후 동결되었고, 2호기로 출격한 아스카는 아라엘의 빛을 이용한 정신 공격으로 무너져버리게된다. 이전 사도 라미엘에게 효과 있었던 포지트론 라이플(양전자포)도 대기권 밖의 아라엘에게는 소용이 없자, 겐도는 롱기누스의 창을 이용하라고 한다. 어차피 초호기의 비밀도 들킨 마당에 자신의 '인류보완계획'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롱기누스의 창을 없애기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여튼 터미널 도그마에 내려간 0호기가 릴리스의 가슴에 꽂힌 롱기누스의 창을 뽑자마자 릴리스의 잘려나갔던 하반신이 재생한다.
이 장면을 통해, 이후에 밝혀지게 되지만 릴리스의 잘려나간 하반신은 초호기의 건조에 쓰였다는 것, 롱기누스의 창이 릴리스의 활동을 멈추게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 릴리스도 '재생'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다. 릴리스도 '재생'할 수 있는 '생명의 열매'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아담의 영혼을 가진 카오루를 보면 아담도 '지혜의 열매'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카오루가 '지혜의 열매'가 없었다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음악'을 좋아하고, 인간의 감정과 AT필드를 이해하며, 자신의 '자유의지'로 신지와 초호기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선택한다.
이와 같은 내용을 토대로, 아담과 리리스 각각의 후손들은 '생명의 열매'와 '지혜의 열매' 중 한가지씩만 가지고 있지만, 아담과 리리스 자신들은 두가지 열매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초호기가 처음부터 '생명의 열매'를 가지고 있다는 가설은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본 블로그의 신세기 에반게리온 관련 포스트들>
'일상, 관심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벌제위명(伐齊爲名) (0) | 2021.05.08 |
---|---|
갤럭시 이온 노트북 사용기 (0) | 2020.09.06 |
죽음의 계곡, 캐즘, 그리고 다윈의 바다 (0) | 2020.08.24 |
리비도와 데스트루도(feat. 신세기 에반게리온) (1) | 2020.08.17 |
폴리뷰(polyview) 전시회 (2) | 2020.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