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 의사 (plaque doctor)

2020. 6. 30. 15:27의료

14세기 부터 18세기까지 유럽에서는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 인구의 약 30%가 사망했다고 한다.

 

피부가 검게 변하며 죽어가는 증상 때문에 흑사병(black death)으로 불리우게 된 이병은, 림프절 부종, 폐렴, 폐부종, 패혈증 등을 일으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게 된다.

 

1894년 프랑스 세균학자 알렉상드르 예르생이 처음으로 흑사병의 원인균인 페스트 균(Yersinia pestis)을 발견하고, 설치류에 기생하는 쥐벼룩을 통해서 인간에게 전파됨을 밝히게 되었다.

 

현재에는 항생제 치료를 받으면 완치 가능한 질병이지만, 흑사병의 치료는 고사하고 원인 조차 알지 못한채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던 당시에는 유럽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공포를 가져다줬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인구 감소 외에도, 흑사병은 유럽 사회에 엄청나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흑사병의 원인을 사회적 소수자, 유대인, 거지 등에게 뒤집어 씌워 마녀 사냥을 하기도 하고,

 

흑사병이 신의 심판이라 했던 종교인들이 오히려 이 병으로 죽어나가자 종교의 권위가 떨어졌다고 하고,

 

농사를 지을 농노가 사라지자, 영주는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는 자본주의적 행태가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

 

유럽의 통치자들은 '역병 의사(plaque doctor)'를 고용하여 흑사병을 치료함으로써, 자신의 체면을 차리고자 했다.

 

하지만 격리와 방역, 비접촉의 중요성을 몰랐던 초기의 '역병 의사'들은 자신을 보호하지 못해 목숨을 잃는 일들이 허다했다.

 

'역병 의사'들은 17세기에 이르러서야 환자를 격리시키고, 환자가 사용했던 물건을 태워버리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고 병의 확산을 막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문헌 고찰과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사진: 의협신문

 

그래서 '역병 의사'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피부 노출을 최소한으로 하였다. 밀랍으로 코팅한 천으로 만든, 상하가 붙은 원피스형 긴 코트를 입었고, 손에는 가죽 장갑, 발에는 가죽 장화를 신었다.

 

머리에는 챙이 넓은 모자를 써서 멀리서도 일반인들이 알아보고 피해갈 수 있도록 했으며, 긴 지팡이를 이용해서 환자를 보거나 약을 줄 때 환자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려고 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적인 장비는 새부리 같은 마스크이다.

 

새 부리 부분의 끝에는 작은 숨구멍이 있어, 여기에는 각종 향료, 허브, 민트 등으로 공기를 정화시켰고, 마스크의 눈 부분도 유리나 안경을 달아 밀폐를 하였다.

 

그러나 흑사병은 공기 전염이 아닌 벼룩을 통해 전염되는 병이었기에, 벼룩이 종종 '역병 의사'의 보호복을 뚫고 들어와 병을 전염시켰다고 한다.

 

출처: http://principlesofknowledge.com/wp-content/uploads/2014/05/311522989011162_00.jpg

 

더 절망스러웠던 사실은, 이 '역병 의사'들이 할 수 있는 치료법이라고 해봤자 고대의 의학서에서 가져온 '환자의 피를 뽑아 흘러내리도록 하는 것(방혈)' 밖에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Doktor Schnabel von Rom" ("Doctor Beak from Rome"), engraving, Rome 1656. Physician attire for protection from the Bubonic plague or Black death.  Paul Fürst (copper engraver)

 

'역병 의사'를 소재로 한 위 그림에서도 마치 '죽음을 몰고다니는 사신'과 같은 이미지였다. '닥터 쉬나벨'이 방문하면 환자가 죽어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그림의 우측 아래 사람들이 도망가고 있다.

 

'역병 의사'는 아무래도 위험하기 때문에, 가난하거나 경력이 없는 의사들이 주로 맡아서 했으며, 그나마도 진짜 의사가 아닌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역병 의사'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위압감과 공포감 때문에, 여러 작품들에서 모티브로 쓰인 캐릭터가 많았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등장하는 사도의 가면도 그 중 하나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사도 사키엘. 역병 의사의 방독면 같은 가면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