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지식의 나무

jjjpapa 2020. 9. 10. 17:49

 

릴리스를 알아차린 카오루

 

<신세기 에반게리온>에는 아담의 후손들, 즉 사도들은 '생명의 열매'를 가지고 있고, 릴리스의 후손, 즉 인간들은 '지혜의 열매'를 가지고 있다는 설정이 있다.

 

릴리스는 중세의 유대교 문헌에 등장하는데, 아담이 하와(이브)를 만나기 전의 아내라고 한다. 구전과 신화적인 얘기를 살펴보면, 아담과 싸우고 나중에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한 뱀이 릴리스가 변신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고, 아담과 헤어지고 루시퍼와 결혼하여 나은 자손을 퍼뜨렸다는 설도 있다. 여튼 신에 대항하는 악마성을 가진 캐릭터인데, 릴리스에 대해서는 후대의 이야기를 만들기 좋아하는 모사꾼들이 재미있게 각색한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릴리스 이야기는 정식 성경에는 채택되지 않았어도, 지금까지 여러 영화, 게임 등에 자주 등장했는지 모르겠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사도와 인간(작품에서는 릴림으로 표현하기도 함)에게는 각각 '생명의 열매'와 '지혜의 열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차이점이 작중에 나타난다.

 

'생명의 열매(작품에서는 S2기관으로 표현하기도 함)'를 가지고 있는 사도들은 '코어'가 파괴되지 않는 한 무한히 살 수 있고, 신체를 재생시키며, 하늘을 날 수 있다. 반대로 '생명의 열매'를 가지지 못한 인간들은 생명이 유한하며, 신체를 재생시키지도 못하고 하늘을 날 수도 없다. 하지만 인간들은 '지혜의 열매'를 가지고 있으므로, 뛰어난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우연히 얻게된 '아담'과 '릴리스'를 이용하여 사도를 물리칠 '에바'를 창조해 낸다. 그리고 유한한 신체의 약점을 보완하도록 각 개체들끼리 협력할 수도 있다.

 

사도 이스라펠과 싸우는 에바 초호기와 2호기

 

 

더 자세한 얘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여기까지 하고, 에덴 동산에 있던 '지혜의 열매', 즉 '선악과'가 열리는 '지식의 나무'가 우리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아보자.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호모 사피엔스의 '인지혁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15만년 전부터 동아프리카에 살았지만 이들이 지구의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퍼지면서 다른 인간 종들을 멸종시키기 시작한 것은 불과 7만 년 전의 일이었다. 그들은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까지 배, 기름 등잔, 활과 화살, 바늘(따뜻한 옷을 짓는데 필수도구)을 발명했다. 예술품이나 장신구라고 분명하게 이름 붙일 만한 최초의 물건들도 이 시기를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종교와 상업, 사회의 계층화가 일어났다는 최초의 명백한 증거 역시 이 시기의 것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런 전례 없는 업적이 사피엔스의 인지능력에 혁명이 일어난 결과라고 믿는다.

 

'인지혁명'이란 약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에 출현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의사소통 방식을 말한다. 이것을 촉발했을 것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이론은 우연히 일어난 유전자 돌연변이가 사피엔스의 뇌의 내부 배선을 바꿨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전에 없던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으며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언어를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잇께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지식의 나무 돌연변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처럼, '지식의 나무', '선악과', '지혜의 열매' 등은 인류가 우주적 관점에서는 매우 짧은 기간인 7만년 동안 엄청난 업적을 만들어낸 '인지', '의식', '언어'의 능력이 촉발되게 된 근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이 지식을 기반으로 한 과학 문명에 있다는 것을, 성경의 창세기에 신화적으로 기술한 것도 놀랍다. 물론 인간의 지식에 대해 성경은 부정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6~17)"

 

창세기에 나와있 듯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순종하고 살라 했지만, 이들은 결국 지식의 나무에 열린 선악과를 먹고 말았다. 이렇게 죽음을 피할 수 없게된 인간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독일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아담과 이브'(1530년 경)

 

 

우리 인간들은 지혜를 가지고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끔찍한 문제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원자력 발전, 방폐장, 핵무기, 유전자 조작, 플라스틱, 나노 기술, 인류멸망 시나리오 등등 아직 해결하지 못했고 언제든지 인류에게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유럽입자연구소(CERN)에서 블랙홀 실험을 하는 것도 지구를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며 실험 금지 가처분 소송이 있었다고 하니, 자신이 가진 지식과 과학의 힘에 대해 우리 인간이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히 두려워하고 과학 연구, 개발을 금지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일방적으로 과학 기술 개발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면,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이 더 음지로 들어가 예측할 수 없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오히려 과학 기술이 인류에게 얼마나 더 안전하고 이익을 될 수 있게 사용할 수 있는지, 과학으로 인한 불가피한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더 과학적으로 생각하고 열린 자세로 토론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선악과'를 먹기 전의 시간으로 되돌아 갈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