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13. 05:53ㆍ커뮤니티, 병원, 요양원
병원을 개설하고 여러 고마우신 분들의 조언을 많이 듣고 도움이 됐었다.
병원이라는 사업체의 경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홍보, 재무, 노무, 세무 등 각 세부 분야에 있어서 생각해봐야할 것들을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설명해준 도서는 최명기 선생님의 <병원이 경영을 만나다>가 유일했다.
저자인 최명기 선생님은 자신도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정신과 의사로서, 듀크대학에서 MBA를 취득하셨다고 한다.
병원 개원을 준비하고 있거나 시작하시는 독자께서는 꼭 읽어야할 필독서라고 추천해드리고 싶다.
다음은 거의 첫 부분에 나오는 내용인데, 매우 감명깊게 본 부분이다. 저자께서는 특유의 부드럽고 따뜻한 필체로 읽는이가 상황을 잘 이해하고 병원 경영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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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의 희망을 앗아가는 말을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
과거에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최고의 브레인 이었던 맥나마라 장관을 다룬 <포그 오브 워> 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서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었다. 그는 정치가로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Never say never” 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아니다.” “안 된다.” 라는 극단적인 표현은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사는 환자의 희망을 앗아가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과거에 유명한 외과계열 교수님이 있었다. 그런데 그 분은 환자와 그 가족이 혹시 수술을 안 하고 조금 기다리면 안 될까 물어보면 다소 극단적으로 반응하는 버릇이 있었다. 교수님은 환자에게 “수술 안 하면 죽어.” 라고 너무나 무심하게 이야기하고는 했다. 그러다가 환자와 가족이 울기라도 하면 여전히 무표정 하게, “울 필요 없어. 수술하면 살 수 있다니까.” 라고 이야기하고는 했다. 물론 교수님의 판단은 옳을 것이다. 의사의 입장에서 그 수술을 하면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 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수술하면 되는데 어떻게 하면 수술을 하지 않고 나을 수 있을까 하는 환자와 가족의 비현실적인 기대가 잘못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환자와 그 가족은 대수술을 한다는 것이 두려울 수 밖에 없고, 가급적 수술 하지 않고 잘 지냈으면 하면 바랬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환자는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운동도 하면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한 그들의 노력과 기대를 “수술 안 하면 죽어요.” 라는 한마디로 무자비하게 무너트려야 했을까?
일단은 환자와 부인이 병을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해서 공감해 주고, 수술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극단적인 말을 하기 전에, 수술을 안 했을 때의 생존율과 수술을 했을 때의 생존율을 비교해서 수술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 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그리고 수술을 했을 때의 위험성을 고려하더라도 수술을 하는 것이 매우 유리하다고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을까? 이런 자세한 설명은 레지던트의 몫이기 때문에 교수님은 그냥 “수술 안 하면 죽어요.” 라고 말한 것일까? 사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으니까 수술을 해도 죽는 것이고, 수술을 안 해도 죽는 것이 아닌가?
이 세상에서 환자가 100% 확실하게 일정 기간 안에 죽는 경우는 없다.
췌장암 같이 사망률이 높은 암도 5년 생존률이 0%는 아니다. 폐암 말기 환자의 5년 생존률도 0%는 아니다. 기적이 아니더라도 운이 좋은 경우도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란 예상할 수 없다. 만약에 5년 생존률이 10%인 말기암에 걸렸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그 환자가 한달 후에 암과 상관 없는 다른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살 확률이 희박합니다.” 라고 의사에게 이야기들은 환자는 하루 하루 죽을 날만 기다린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고로 죽게 된다. 의사에게 “10%의 확률이 있습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맙시다.” 라고 이야기를 들은 환자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가족과 함께 노력하다가 죽는다. 두 죽음은 같은 죽음일수도 있지만 다른 죽음일수도 있다.
환자들이 오랜 암 투병 끝에 사망한 후 우울증에 걸려서 오는 가족들이 간간히 있다. 그 분들이 대학병원 교수님에게 들은 가장 마음 아픈 말이 “병원에서는 진통제 드리는 것 이외에는 할 게 없습니다.” 라고 한다. 의사들은 말기암 환자들이 굿을 하거나, 신비의 명약, 입증되지 않는 식이요법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죽기 전에 자신이 죽음을 납득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게 된다. 그런 환자와 가족들의 마음을 의사가 아닌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의사의 입장에서는 암조직을 완전히 제거해야 치유라고 생각한다. 의사의 입장에서는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된 환자가 완전히 걷게 되야 치유라고 생각한다. 단지 고통만 덜어주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고통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의사들이 생각하는 진통제와 환자가 생각하는 진통제는 같은 약이면서도 완전히 다르다. 전문의로서 도울 수 없으면, 의사로서 환자를 돕고, 의사로서 환자를 도울 수 없을 때는 한 인간으로서 환자를 도울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환자를 돕는 다면 말기 암 환자가 굿을 하거나, 신비의 명약을 찾거나, 입증되지 않는 식이요법을 하는 대신, 의사에게 올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포기하지 않아야 그들도 다른 곳을 찾지 않는다.
요새 의료소송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선생님들은 환자에게 무조건 최악의 상황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치료가 잘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가 만약에 안 좋은 상황이 생기면 환자들이 소송을 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최악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나름대로 설명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실제 사례들을 보면 꼭 그것만도 아닌 것 같다. 공감과 따뜻함이 결여된 상태에서 최악의 상황을 얘기하면 그것은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큰 상처가 되고 의사가 환자를 이미 포기한 듯한 느낌마저 줄 수 있다. 그런 경우 안 좋은 결과가 생기면 가족들은 역으로 최악의 상태인데 최선의 진료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소송을 제기하기도 한다. 단지 냉정하게 최악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는 의료 사고를 막지 못한다. 설명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시술의 위험성, 필요성, 예후를 객관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하지만 환자에게 희망을 앗아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가 남에게 하는 말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정상인도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소리 내어 혼잣말을 하게 된다. 평상시에도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언어의 형태건, 감정의 형태건, 사고의 형태건 메시지를 보낸다. 마음 속으로 말을 건다. 따라서 스스로 에게도 희망을 앗아가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제 끝장이다.” “이제 망했다.” “끝이 안 보여.” “지겨워 죽겠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이런 메시지를 자신에게 계속 보내는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길 수 없다. 그런 사람은 타인에게도 희망을 앗아가는 말을 하게 된다. 우리 자신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계속 주는 것이 모든 행운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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