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3. 14:30ㆍ의료
의사의 파업을 존중해달라는 글에 <소방관이 파업을 해서 당신 집에 불을 끄러오지 않아도 파업을 지지한다는 얘기를 할 수 있느냐?>라는 댓글이 달린다. 이미 마음 속에 답을 정해놓은 분들에게 의사들의 절박하고 합리적인 주장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이런 국민들과 반대편에서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의사들도 분명히 있다. 이분들은 <의사들은 특권의식에 쩔어있는 돈만 아는 개새끼>라는 프레임으로 공격하는 상대편에게 합리적인 논리와 주장만으로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느냐며, 지금도 겨우 유지되는 <중환자실, 응급실, 수술실 등 필수의료를 멈추게 하는 더 강한 실력행사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력한 파업 투쟁을 주문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은, 강한 팬덤을 형성한 지지층을 내세워 일방적으로 졸속 정책을 추진하고 모종의 정책 거래 의혹이 불거지는 사태를 야기한 여당의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책임이 가장 크겠지만, 어느 정도 이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던 최근 몇년동안 우리 의사들은 대한의사협회를 중심으로 어떻게 대응해야했을까 복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극단적으로 비판하자면, 대한의사협회는 "투쟁"에 비해 시간이 오래걸리고 많은 사람들을 이해시켜야하기 때문에 답답했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바른 의료"를 만들어갈 끈질기고 집요한 "논의"와 "협상"을 할 수는 없었을까? 일부분 불합리한 정책을 수용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잠시 불편하게 하더라도, 그렇게 잠깐 눈을 감고 시간을 벌 수는 없었을까? 강한 신념과 의지로 부당한 통제를 벗어나 우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획득하고, 미래의 의사들을 키워 대한민국 의료의 새로운 희망을 꿈꿔볼 수는 없었을까? 물론 이런 방법들에 대해서는 정책 결정에 있어 권력의 격차가 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벌써 몇번의 투쟁 경험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바른 의료"가 쉽고 간단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먼저 대한의사협회는 대한민국이 추구해야 하는 의료, 즉 "환자"와 "의사"가 중심이 되고, 의료서비스의 질이 담보되면서, 공급자와 소비자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지불체계와 보상기전 등 "바른 의료"의 정의에 대해 회원들의 합의를 먼저 이끌어냈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정부와의 협상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우리가 어렵게 합의한 "바른의료"의 가치는 지키도록 회원들에게 믿음을 주고 결속력을 다졌어야 했다. 하지만 대한의사협회는 2000년 의약분업 파업 이후에도 수가 정상화 주장과 불합리한 의료정책에 대한 반대 의견만 단편적으로 생산해왔다. 대한민국 의료의 장기적인 계획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통찰력있는 논의나 합의점을 만들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움직임은 모든 회원들이 느낄 수 있을만큼 절박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는 대한민국 의료가 왜 비정상적인 것인지도 알고 있다.
이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의학적 치료와, 조금이라도 더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고자 하는 국민들의 다양해진 욕구를, 1977년 만들어진 국민건강보험의 "강제지정제"와 "저비용 구조"로는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공적 재정을 투입하면서 저비용 구조를 해결할 것인지, 공적 재정이 부족하다면 복수의 민간보험을 통해 재정을 확보할 것인지, 증가된 비용으로 어떻게 국민을 만족시키는 의료서비스를 만들 것인지 수많은 사안들을 결정해야 한다. 여기에는 작년에 시행이 시작된 '보건의료지원법'에 근거한 '보건의료인력종합계획'의 수립도 포함된다. 이렇게 어려운 결정에는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에게 설명하고 논의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하지만 정부와 정치인들은 그저 교육의 질이 담보되지 않은 의사의 증원과 수련병원도 없는 공공의대 설립이라는 단순한 해결책만을 모종의 정책거래 의혹과 함께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다.
우리가 문제의 해결책을 알고 있더라도, 이 해결책이 국민들에게 지지를 얻는 과정은 더욱 험난하다는 사실도 알고있다.
"의사는 공공재"라는 부당한 프레임을 씌우는 정부와 여기에 동조하는 국민들, 의료기관의 영리 추구는 절대로 불가하다는 많은 시민단체들과 공존해야 하는 대한민국에서 우리 의사들은 어떻게 "바른 의료"를 추구할 수 있을까. 지금도 당정청은 입법예고 기간만 지나면 언제든지 다수당의 지위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해도 정치적으로는 비판받을 수 있으나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 혹시라도 필수의료를 지탱하는 수련병원들이 멈춰 역풍을 맞을까봐 눈치를 보고 있겠지만, 이번 기회에 의사들의 파업을 해결하는 영웅이 되고자 하는 정치인과 관료들이 있어서 더 빨리 추진하지 못하고 있을 뿐, 젊은 의사들이 파업을 유지하든 말든 4대악 의료정책을 법적으로는 막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시간이 지나면 젊은 의사들의 파업도 끝이 날 것이다. 그리고 그 결말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의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일반인의 상식적인 잣대로만 의료정책을 추진한 많은 나라의 국민들은 의료서비스의 질 하락과 수준 높은 의사들의 부족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 특권층에게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대한민국의 대다수 선량한 국민들이 이런 사실을 잘 살펴봐주시기를 나도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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