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론과 자유의지에 대해서

2020. 8. 10. 22:49과학

생명체에서 마음의 활동, 즉 자의식적이거나 또는 마음의 다른 작용에 해당하는 시공간적 사건들은 엄격하지는 않더라도 통계학적으로 결정론적이다.

 

'양자론적 불확정성'은 아마도 감수분열, 자연변이 그리고 X선에 의한 돌연변이 등과 같은 사건들에서 그것들의 우연적인 특성을 높일 수 있겠지만 생물학적인 다른 문제, 즉 '유기체는 스스로의 구조를 파괴하려는 경향에 대해 어떻게 저항하는가?', '유기체의 유전물질은 어떻게 불변인 채로 유지되는가?', '이 유전 물질은 어떻게 그리도 충실하게 그 자체를 재생산해낼 수 있을까?' 등의 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순수한 기계라고 선언하는 것'은 직접적인 자기 성찰에 의해 보장되는 자유의지에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지더라도, 일단 사실이라고 간주해보자. 그리고 아래의 두 전제가 서로 모순 없는 결론을 이끌어내는지 알아보자.

 

1. 내 신체는 순수한 기계로서 자연의 법칙에 따라 기능을 나타낸다.

 

2. 그렇지만 나는 논쟁의 여지가 없이 명백하고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효과를 예상할 수 있는 운동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 효과는 운명적일지도 또 매우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며, 그럴 경우에 나 자신이 그 효과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느끼고 또 가져야 한다.

 

두가지 전제로 부터 가능한 추론은, '나'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원자들의 운동>을 조절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대체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에 독특한 모든 경험과 기억을 통해 개성적인 그 무엇, 다른 누구와도 구별되는 그 무엇을 이루고 있고, 그것이 '나'라는 명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를 세밀하게 분석하면, 경험과 기억이라는 개개 자료(정보)들을 모아 놓은 캔버스이며, 좀더 정확하게는, 여러가지 새로운 자료(정보)들이 쌓이는 바탕재료인 것이다.

 

의식은 그 스스로가, 한정된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의 구체적 상태, 즉 신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또 그것에 의존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춘기, 노화, 망령 등 신체의 발달과 성숙에 따른 정신의 변화를 생각해보라. 또는 발열, 중독, 마취, 뇌병변 등이 정신상태에 미치는 효과에 대해 고려해보라. 이렇게 되면, 한 사람에서도 비슷한 신체가 여러개 존재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의식 또는 정신도 여러 개가 있을 수 있다는 가설(영혼의 복수가설)은 매우 그럴 듯 해보인다.

 

이런 사상에 따라 신체의 수만큼 영혼도 많다는 생각이 생겼고 그 영혼들이 신체처럼 사멸할 운명인지 아니면 영생불멸하며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질문이 던져지게 된다. 이 중에 후자는 서양의 모든 공식적인 종교 교의에 쓰이게 되었고, 어리석게도 '복수가설'의 근거를 무시하고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만약 의식도 신체와 더불어 소멸한다고 선언한다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대안은, 의식은 한 가지로 경험되며 그것의 복수형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는 직접적인 경험을 견지하는 것이다. 가우리산카르(Gaurishankar)와 에베레스트 산이 다른 골짜기에서 보이는 같은 봉우리인 것 처럼 말이다.

Gaurishankar (사진 : Wike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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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트는 에르빈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의 에필로그를 요약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