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5. 16:13ㆍ의료
*환자 진료 에피소드를 재구성하였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은 모두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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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에는 박대원 환자가 작업치료를 시작하였다. 왼쪽 손으로 글씨를 쓰지 못했던 실서증과, 왼쪽 손으로 빗과 망치 같은 도구를 사용하도록 말로 듣고 흉내 내는 것을 잘 하지 못하던 증상(ideomotor apraxia, 관념운동실행증)이 입원 초기에 비해 얼마나 좋아졌는지 먼저 확인해 보았다.
“어르신, 오른손으로는 글씨를 잘 쓰셨는데, 왼손으로도 글씨 쓰는 연습을 지금부터 해보려고 해요. 여기 앞에 있는 종이에 어르신 이름을 적어보실 수 있으시겠어요?”
어르신은 왼손으로 사인펜을 잡고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써보려고 시작했다. 박대원의 ‘ㅂ’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이상을 쓰지는 못했다. 두 가지 측면에서 호전이 있었다. 완성된 글자가 아니긴 하지만 형태가 있는 자음이었다는 것, 그리고 같은 패턴이 반복해서 나오던 보속증이 없어진 것이다.
“네, 잘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어르신 이름 ‘박대원’을 불러드릴 테니, 듣고 써보세요.”
이번에도 ‘박’과 거의 비슷하게 써볼 수 있었는데, 형태는 좀 불분명했다.
“좋습니다. 여기에 제가 아버님 성함을 미리 적어두었어요. 이걸 보시고 직접 따라 써보시겠어요?”
다행히도, 자신의 이름을 보면서 따라 쓰는 것은 예쁜 글씨는 아니었어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게 잘 썼다. 처음에 비해서는 분명한 발전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도구를 사용하는 흉내를 낼 차례이다.
“어르신, 이전에도 했었지만, 여기에 빗이 있다고 생각하고 왼손으로 머리 빗질하는 흉내를 내보시겠어요?”
안타깝게도 왼손으로 하는 빗질 흉내는 처음과 큰 차이가 없었다. 망치질 흉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몇 가지 테스트를 더 진행하고 말했다.
“아버님, 쉽지 않았을 텐데 정말 고생하셨어요. 처음에 비하면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며칠 더 열심히 연습하면 훨씬 더 좋아질 겁니다.”
“네, 저도 더 좋아질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르신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하하. 저도 아버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리 힘이 지난주에 비해 많이 좋아진 것처럼, 왼손도 더 좋아지도록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박대원 환자는 뇌경색의 급성기를 잘 보내고 성공적인 회복기의 과정에 접어들고 있었다. 조만간 퇴원하여 집에서도 잘 지내실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이는 부인과 아드님의 역할과 도움이 절실한 부분이다. 어르신이 뇌경색 이후 생긴 변화와 앞으로의 삶에 대해 설명 드리기 위해 부인과 아드님이 모두 가능한 시간에 상담 약속을 잡았다.
퇴원 하루 전이 되었다. 상담을 위해 진료실에 찾아온 박대원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뇌경색 이후의 삶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입원하신 기간 동안 환자와 가족 분들께서 열심히 치료를 받으셔서 어르신의 뇌경색 증상들이 좋아졌습니다. 입원하신 날에 비해 오른쪽 다리 힘이 좋아져서 이제는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고, 전두엽 증상 때문에 멍하고 말씀이 없던 증상도 많이 좋아졌습니다. 저도 담당 의사로서 이렇게 좋아지시는 분들을 보면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제는 집으로 퇴원하여 일상생활로 복귀하셔야 합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지금의 회복 속도를 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훨씬 많이 좋아지시리라 생각합니다.”
희망적인 이야기에 부인과 아드님의 표정이 한층 밝아지셨다.
“이렇게 회복하시는 동안에는, 어르신의 말씀이나 반응이 느리고 답답하셔도 좀 더 참아주시고, 늘 좋아질 수 있다는 말씀을 많이 해주시면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환자는 몸이 아무래도 불편하기 때문에 잘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데, 집안 일 중에 간단한 것들, 특히 도구를 사용하는 작업은 직접 할 수 있도록 유도해주세요. 그리고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서 자꾸 걷도록 해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지금도 많이 좋아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좋아질 수 있다고 하니까 희망이 생깁니다.”
부인과 아드님이 자신 있게 대답해주셨다.
어르신께서는 퇴원을 하게 되면 외래를 통해 주기적인 진료를 받게 될 것이다. 큰 사고가 있거나 수술 받을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앞으로도 항혈전 약물을 포함하여 당뇨와 고지혈증을 치료하는 약물을 처방받아 지속적으로 복용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병원의 재활 치료실을 통원하면서 규칙적인 물리 치료와 작업 치료, 운동 치료를 규칙적으로 받음으로써 뇌졸중으로 인해 잃어버린 기능을 회복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환자와 가족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뇌경색이 한 번 생긴 분들은 1년 안에 재발할 확률이 10% 정도이고, 5년 안에 재발할 확률이 20~30% 정도라고 합니다. 어르신의 당뇨와 고지혈증을 잘 치료하고, 항 혈전 약물을 복용하는 것, 그리고 생활 습관을 건강하게 바꾸는 것은 모두 이 재발할 확률을 낮추기 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경색은 다시 재발할 수 있습니다.”
뇌경색이 발생했음을 의심할 수 있는 증상들은 다음과 같다. 갑자기 말이 어둔해지는 경우, 몸의 한쪽 편 팔이나 다리의 힘이 빠지거나 감각이 달라질 경우, 사물이 둘로 나뉘어 보이거나 잘 보이지 않는 경우, 걸음을 걷지 못하거나 어지럼증을 느끼는 경우, 평소와 다르게 혼돈 증상을 보이는 경우, 의식이 저하되어 계속 잠을 자거나 자극을 주어도 눈을 뜨지 못하는 경우, 갑자기 심한 두통을 느끼는 경우 등이다.
급성 뇌경색은 한시라도 빨리 진단과 치료를 시작해야 그 후유증을 줄일 수 있으므로, 이런 증상이 발생하면 119로 연락하여 뇌졸중 센터가 있는 의료기관으로 이송해야 한다. 급성 뇌경색의 치료에는 증상의 발생 시간에 따라 치료 방법이 달라지므로, 증상을 발견한 보호자는 언제 그 증상이 발생했는지 또는 언제까지 상태가 괜찮았는지 시간을 미리 기억해서 의료진에게 알려주면 큰 도움이 된다. 그리고 뇌경색 환자와 보호자는 혹시라도 뇌경색이 재발할 것에 대비해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뇌졸중 센터가 있는 의료기관이 어디인지 확인하는 것이 좋다.
“제가 말씀드릴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내일이면 어르신께서 집으로 퇴원하시는 날입니다. 그동안 너무 고생하셨고, 잘 회복해서 퇴원하시는 것 축하드립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을 메모한 뇌졸중 환자 안내 브로슈어를 부인께 드렸다.
“감사합니다. 입원하는 날 너무 걱정되고 슬펐는데, 이렇게 좋아진 것이 기적 같아요.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별 말씀을요. 치료에 잘 협조해 주셔서 제가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외래에서 계속 뵙게 될 꺼니까 언제든지 문제가 생기거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다음 날 아침 회진을 통해 박대원 환자는 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집으로 퇴원하였다. 퇴원하는 환자와 부인, 아드님을 보면서 나는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드님이 처음 면회를 왔을 때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조차 잘 대답하지 못하는 것과 멍한 상태로 변해버린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는데, 증상이 많이 회복한 지금은 평소와 다름없는 아버지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 아드님에게는 그의 아버지가 낯설어 보였다가 다시 익숙해진 것일까?
분명히 우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생각과 욕망, 희망, 매일 결정하는 수많은 선택들, 그리고 그로 인한 행동으로 그 사람의 개성과 자아가 규정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각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질 수 있고, 또한 각자가 특별한 존재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뇌에 병이 생기게 되면, 그 병이 생긴 부위와 기전에 따라, 우리는 그동안 잘 유지해왔던 ‘나’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양자역학을 태동시킨 슈뢰딩거는 1944년 그의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원자들의 운동’을 조절하는 생명체라고 하였다. 당시에는 인간의 감정이나 선택이 기독교적 사상과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영혼’ 또는 ‘자유의지’의 결과라 믿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슈뢰딩거는 이러한 자유의지가 신경과학의 결과를 벗어날 수는 없음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무엇이든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무한한 상상력, 창의성, 가능성이 있다”라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인간은 이처럼 이미 결정된 수천 가지 요인에 무의식적으로 영향 받는 뇌라는 물질화된 신체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또한 그것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걷지 못한 어르신을 통해, 신경과 의사인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인간의 뇌와 우리의 의식에 대해 궁금증이 꼬리를 물며 떠올랐지만, 연상되는 질문들에 매달리기에는 오늘도 바쁜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도 박대원 어르신에게 뇌경색이 재발하지 않고, 환자와 가족 분들이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면서, 나는 오늘의 외래 진료를 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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