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케플러의 생애
학창시절 지구과학 시간에 배운 케플러의 행성운동에 관한 세가지 법칙은 다음과 같다.
제1법칙(타원궤도의 법칙)
행성은 태양을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그린다.
제2법칙(면적 속도 일정의 법칙)
태양의 중심과 행성의 중심을 잇는 선이 그리는 면적은 항상 일정하다.
제3법칙(조화의 법칙)
행성의 궤도에서 타원의 긴 반지름의 세제곱과 공전주기의 제곱의 비는 행성과 관계 없이 일정하다.
교과서에서 단순히 외우고 넘어간 위 법칙들은, 지구 중심설과 태양 중심설의 대결이 절정이었던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살았던 요하네스 케플러라는 과학자의 생애에 걸친 연구 덕에 알게 된 명제들이다.
1571년 독일에서 태어난 케플러는 일찍이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하라는 신학 공부는 안하고, 수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특히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배우면서 완전한 형상과 코스모스의 영광을 엿보았다고 생각했다. 케플러는 그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적어두었다.
"기하학은 천지 창조 이전부터 있었다. 기하학은 신의 뜻과 함께 영원히 공존한다... 기하학은 천지 창조의 본보기였다... 기하학은 신 그 자체이다."
그리고 당시에는 위험한 사상으로 취급받았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해서도 접하게 되었다. 태양 중심의 우주관은 케플러의 종교관과 공명하였기에 이 가설을 뜨겁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생활이 어려웠던 그는, 오스트리아의 그라츠로 가서 중등학교 수학 선생님이 된다. 부족한 월급 외 수입을 얻기 위해서, 천문과 기상 현상에 관한 책력을 제작하여 별점을 치기도 하였다.
"신께서 모든 동물들에게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주셨듯이 천문학자에게는 점성학의 길을 열어주셨다."
라고 케플러는 자기 책에 썼으며,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케플러를 "최후의 점성술자이자, 최초의 천체물리학자"라고 하기도 했다.
...
성격에 맞지 않고 지루했던 시골 학교의 수학 강의 시간에 문득, 케플러는 '플라톤의 입체'로 불리는 다섯 가지 정다면체를 떠올리고, 정다면체는 다른 정다면체 안에 꼭 맞게 들어갈 수 있는 특징으로 태양과 행성들 사이의 거리를 결정한다면, 행성의 여섯 개 구(당시에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과 토성 6개의 행성만 알고 있었다.)들을 유지해주는 하나의 투명 구조물을 찾아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케플러는 자신의 이론을 담아 뷔르템베르크 공작에게 후원을 요청하는 연구 제안서도 보냈다. "내접된 정다면체 다섯 개의 3차원 모형을 은과 보석으로 만들어, 공작의 잔으로도 쓸 수 있게 하고, 다른 이들도 거룩한 기하학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제안이었지만, 값싸게 종이로 먼저 만들어 보라는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이런 흑역사에도 케플러는 자신의 이론 증명을 위해 열심히 밤을 지새워 계산을 했지만, 정다면체와 행성의 궤도는 일치하지 않았다. 이 정도까지 가면 범인들은 행성의 궤도가 밥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적당히 포기할 것 같은데, 케플러의 연구를 완성시켜갈 중요한 계기가 생겼다.
당시에는 망원경도 없이 맨눈으로 행성의 겉보기 운동을 관측하여 방대한 자료를 가진 자가 있었는데,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2세의 황실 수학자로 일하고 있던 튀코 브라헤였다. 튀코 브라헤는 자신의 자료들을 수학적으로 정리하고 분석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케플러를 프라하로 불러들이게 된다.
하지만 튀코 브라헤는 자신이 평생 애써 모은 자료를 이 새파랗게 젊은 잠재적 경쟁자에게 조금씩만 던져주었고, 케플러와의 갈등은 심해져만 갔다. 그런데 케플러를 부르고 18개월 밖에 안지난 시점에 어처구니 없게도, 튀코 브라헤는 로젠버그 남작의 만찬장에서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시고 예의를 차리느라 화장실도 못가서 방광염에 걸렸고, 이후에도 음주를 자제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만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자신의 관측 자료를 케플러에게 물려준다고 유언한 덕분에, 케플러는 이를 토대로 계속 연구할 수 있었다.
...
당시에 가장 정확하고 방대했던 튀코 브라헤의 관측자료를 연구한 케플러는 자신의 '코스모스의 신비' 가설이 틀렸음을 알게된다. 또한 행성의 궤도는 고대로 부터 완벽한 도형으로 생각되어 왔던 '원' 궤도가 아니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말똥'이라고 비유한 타원형 곡선을 계속해서 시험해 봤다.
지금과 같은 컴퓨터가 없으니 케플러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최소 2절지 수백장에 걸쳐 70여 차례 반복해서 계산했다고 한다. 열심히 계산해 내려가다 산술적 실수를 하기도 하고, 옳은 답인데 틀린 것으로 여기기도 했으며, 자신이 수행한 긴 계산 과정을 따라가다가 혹시 지루하다고 불평할지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서, "이 지루한 과정에 진력이 나시거든, 이런 계산을 적어도 70번 해본 저를 생각하시고 참아주십시오."라고 메모를 남겼다고 한다.
결국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페르가의 아폴로니우스가 처음 만들어 낸 타원의 공식을 이용해서, 계산 결과가 튀코 브라헤의 관측값과 완전히 일치함을 확인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케플러는 1609년에야 <신천문학>이라는 논문으로 제1법치과 제2법칙을 발표했고, 이후 자신의 생애동안 추구했던 '조화(harmony)'라는 이름을 가진 제3법칙까지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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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탄생한 케플러의 법칙은 귀납주의로 얻어낸 경험 법칙이라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는 후대에 밝혀지게 된다. 즉, 케플러의 법칙으로 행성운동을 지배하는 근본 법칙, 만유인력의 법칙을 이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요하네스 케플러가 행성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천상 세계의 조화를 밝히고자 했던 목표는, 그가 죽고 36년이 지난 후에 아이작 뉴턴의 연구를 통해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출처)
1. <코스모스> 칼 세이건, 3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
2. http://dongascience.donga.com/news.php?idx=31802
3. http://dongascience.donga.com/news.php?idx=32105